칠레 와인의 아버지 토레스


겨울을 눈앞에 둔 절기인데도 무척이나 포근한 새벽이었다. 외국에서 돌아온 아들과 함께 첫 비행기편으로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향을 찾았다. 안개가 짙어서 어딘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마을을 지나고 저수지를 돌아 산에 다다랐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풍진에 찌든 몸을 씻겨주는 듯했다. 연방 숨을 내쉬며 자연의 신선함으로 마음까지 가다듬게 됐다. 준비해 간 과일과 과자에 와인을 한 잔씩 따라놓았다.

여기에 엎드리려고 하니 새삼 옛정이 스며 오른다. 잡풀 몇 가지를 휘어 뽑고, 잘 드시라며 무덤가에 술을 뿌렸다. 가슴이 트이고 몸이 가뿐해졌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멀리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아래 내가 살았던 동네와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주니 그저 미소만 짓는다. 저녁에 와인을 두어 잔 마신 후 책을 집어들었다. <겁 많은 자의 용기>란 자서전이었다. 800쪽에 이르는 장문이었지만 이틀 만에 완독했다.

저자가 친인척인데다 딸의 주례를 서 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회의 올바름을 평생 추구하신 분이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정독했다. 그중 한 에피소드가 우리네의 단면을 알려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저자도 동행했는데 만찬장에서 당시 한국의 한 장관이 수상자의 동생과 동석했다. 그 동생이 빵에 바를 잼이 필요하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관이 일어나 어디론가 가서 잼을 구해 왔다고 한다. 저자는 장관이 나랏일을 해야지 잼을 가지러 일어서는 게 어디 있느냐며 바른 말을 했더니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절 몇 번씩이나 높은 자리를 제의받았지만 모두 물리치고, 측근 정치의 폐해 같은 쓴소리만 해서 집권층의 눈 밖에 난 저자다. 책의 뒤표지를 보니 시인 고은 씨가 ‘선, 정직, 의리 그리고 공공에 대한 사명감은 선생의 가슴에 언제나 불을 밝혔다’는 글을 남겼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공공기관에서 일했던 옛 시절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향수를 살리는 데 명품 와인보다는 칠레 와인이 제격일 거라고 생각했다. 만소 데 벨라스코(Manso De Velasco) 1997년산을 잔에 따랐다. 칠레 와인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스페인의 미겔 토레스(Miguel Torres)가 칠레로 건너 가 만든 와인이다. 만소 데 벨라스코는 토레스가 생산되는 칠레의 와인 생산지 쿠리코 시를 세운 스페인 총독의 이름이다. 10년이 지난 신세계 와인인데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여전히 맛있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같은 시기 와인과 비견될 만큼 잘 숙성돼 있었다. 입에 대자마자 스르르 목젖을 적시며 빨려가는 듯했다. 칠레 와인을 논할 때 어떤 와이너리도 토레스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칠레 와인산업에 대한 토레스의 공헌도가 높다.

토레스는 79년 사회주의 시절 칠레에 진출했다가 좌절한 바 있다. 하지만 10년 후 다시 진출해 낙후됐던 칠레 와인의 현대화에 길잡이 역할을 했다. 토레스에 이어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 외국 와인 자본과 기술이 잇따라 칠레에 상륙했다. 그 결과 얼마 전 미국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선정한 올해 1위 와인에 칠레 와인인 클로 아팔타 2005년산이 오를 수 있었다.

좋은 씨앗을 뿌린 덕에 세계 1등 와인이 칠레에서도 나오게 된 것이다. 호주 펜폴즈의 그랜지가 90년대 이 잡지에서 1위에 오른 이후 호주 와인이 글로벌화됐듯, 세계 와인 평준화의 시기가 예상보다 빨리 왔다는 생각이다. 만소 데 벨라스코의 숙성된 맛에서 이미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도 토레스 같은 선각자들이 필요해 보인다.

by vinamour | 2009/02/15 23:07 | forbes | 트랙백

와인과 오디오의 화음



추석을 보내고 기다리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인터넷 오디오 동호회에서 공동 제작한 신형 포노 앰프(턴테이블용 앰프)를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 빈티지의 1등급 보르도 와인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아날로그 음악을 재생하는 데 필수적인 포노 앰프는 예정보다 석 달 이상 늦어져 적은 예산으로 좋은 소리를 듣고자 한 욕심을 지치게 했다. 60년대 와인은 구하기도 힘들고 너무 고가다. 어디에 있는진 알았지만 같이 돈을 내고 마실 ‘공동 구매자’가 필요했다. 다행히 공동 구매자를 구하고 외국에서 와인까지 샀다는 소식이 들렸다. 때마침 앰프도 제작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들뜬 마음으로 공항 고속도로를 오가며 와인과 앰프를 찾아왔다.

와인과 오디오는 닮은 점이 많다. 일단 돈만 있으면 그와 관련된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죽기 전에 마셔야 할 100대 와인 중 1위를 차지해 구입이 힘들 것 같은 ‘샤토 무통 로쉴드 45년산’도 공개적으로는 런던에 두 병이 있다. 궁극의 소리를 들려준다고 알려진 20억원대 오디오 세트도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다. 또 하나 비슷한 점은 와인은 마셔봐야 그 참맛을 알 수 있고, 오디오도 소리를 들어봐야 그 진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와인을 알아갈 무렵 어느 와인 책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난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악보부터 보고, 로맹 롤랑의 베토벤 전기를 다 읽은 뒤에야 듣는 것은 와인을 마시기도 전에 양조법, 지리학, 기후학 관련 책을 독파한 다음에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곡을 들어서 기분이 좋아지고, 그 와인을 마셔서 맛있으면 그만이다.’

둘 다 오래된 것이 좋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구대륙 와인은 여러 와인을 섭렵하며 기본적으로 10~20년은 보내야 그 오묘한 조화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훌륭한 빈티지 와인이라면 세월이 흐를수록 심오한 감정의 골짜기로 빠져들게 된다. 최신 기술이 집약된 오디오 케이블보다 20년대 ‘고물 선’이 더 인간적인 소리를 들려주곤 한다.

실제 와인 평론가들도 생명력이 50년 이상인 와인을 훌륭한 와인이라고 쳐준다. 60년대 진공관 앰프가 “이제야 제 소리가 난다”는 찬사를 들으며 비싼 값에 모셔지는 것도 비슷하다. 대박이라고 불리는 2005년산 보르도 와인도 다음 세대로 상속해야 훌륭한 와인이 되고, 지금은 소리가 별로라는 신형 앰프도 10~20년 뒤엔 천상의 음을 뿜어주리라 예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포노 앰프는 처음엔 까칠한 소리가 거슬리더니 일주일이 지나 차분해졌다. 한 달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기에 전원을 넣은 채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결과는 그때 가봐야 안다. 함께 온 와인도 비행기 멀미에 소음과 진동, 햇볕에 노출됐으니 이 역시 와인 셀러에서 한 달은 눕혀 놓아야 한다. 마시기 2주 전엔 다시 세워둬 병 속의 부유물을 가라앉혀야 한다.

기다림은 길었다. 60년대 와인이 내게 오기까진 무려 반세기 가까이 걸렸다. 그동안 농부는 포도를 따서 발효하고, 이를 오크통에서 숙성하고, 다시 병에 담아 어둡고 서늘하고 조용하고 음습한 지하에서 천천히 잠을 재웠다. 진정한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와인은 제 맛을 내기 위해 연륜을 쌓아온 셈이다.

아침부터 목욕하고 옷을 갈아 입은 뒤 오후 늦게 설렁탕으로 요기만 했다. 서너 시간만 지나면 낙엽이 떨어지는 저녁이 될 것이다. 여러 진공관을 바꿔가며 이제 제자리를 잡은 앰프를 통해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부터 피에르 푸르니에의 ‘바하 무반주 첼로’ 전곡을 차례로 들으며 61년산 샤토 라피트 로쉴드의 황홀감 속에서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이했으면 한다.

by vinamour | 2009/02/15 22:59 | forbes | 트랙백

헵번의 우아함이 눈앞에


가을의 문턱에 다다르면 와인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와인으로 생겨난 옛 이야기들도 이따금씩 새록새록 되새겨진다. 오랜만에 방을 정리하다가 10년 전 인터넷 와인 동호회를 처음 만든 해에 회원이 올린 글을 모아놓은 책을 찾아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때 그 시절, 여러 회원들이 올린 아름다웠던 글들과 인간적인 면모들이 희미하게 다가왔다.

세월이 제법 지나 아직 연락이 되는 회원도 있긴 하지만 대개 잊혀지고 말았다. 당시 와인 동호회는 잣대를 엄격히 적용해 오로지 와인 중심의 대화와 글이 오고 간 모임이었다. 모든 모임에선 어느 외국 와인 잡지에 실렸던 다음 ‘와인 테이스팅 10계명’이 기본이었다.

첫째, 5~10명 정도의 적은 인원으로 시작하라. 그래야 쉽게 조정이 가능하다.
둘째, 적정 예산을 정하라.
셋째, 품질 좋은 와인 잔을 구비하라. 잔에 따라 맛의 느낌이 크게 차이 난다.
넷째, 지역이나 품종 등 테마를 정하고 한번에 5~8가지 이내의 와인만 맛보라. 적을수록 좋다.
다섯째, 와인에 대한 선입관을 배제하라. 라벨을 가린 블라인딩 테이스팅이 가장 좋다.
여섯째, 알맞은 조명을 갖추고 보면서 배우라.
일곱째, 맵고 강한 향이 나는 음식을 피하라. 음식 없이 맛 보고, 음식과 함께 맛 보면 그 차이에 놀랄 것이다.
여덟째, 참가자들과 많이 이야기하라. 귀가 번쩍 뜨이는 표현들이 나온다.
아홉째, 마신 와인에 대해 적어라.
마지막으로 과하다 싶으면 마시지 말고 뱉어라. 좋은 와인을 뱉는 건 죄가 아니다.

난 모임 때마다 이 10계명에 따라 마신 느낌을 일어나서 발표하도록 했고, 군기반장까지 뽑아 후기를 쓰도록 독려했다. 유명 미술관의 신참 큐레이터였던 어느 회원은 와인 테이스팅을 조선 궁중 화가들의 유명 그림만 엄선해 놓은 전시회를 본 느낌이었다고 적었다. 이후 그가 일하던 호숫가 미술관의 낙엽 지는 정원에서 와인을 즐기기도 했다. 음악 관련 잡지사에 다니던 한 회원은 음악을 듣고 즐기는 데 있어서 알고 감동하는 것과 모르고 감동하는 것의 차이를 와인에 견줘 말했다.

친해질수록 얼마나 더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가를 말했던 것이다. 그 회원 덕에 서울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 공연 후에 음악과 와인이 어우러진 ‘번개’들이 이어졌다. 같은 음악계지만 공연기획사 직원이었던 회원의 도움으로 외국 유명 연주자의 연주를 코 앞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그만 화랑에서 오페라 박사인 강사를 초빙해 오페라 강좌를 열고 와인으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당시 추억의 토막들이다. 어느 휴일 초저녁 부슬비 속에 바이올린 곡을 들으며 옛 글을 펼치고 있는데 기념할 만한 와인 한 병을 가져온 와인 지기가 있었다.

샤토 마고(Margaux) 1990년산. 그는 예전에 96년산 마고를 마시고선 007 영화에 등장한 수영복 차림의 할 베리란 촌평을 던졌는데, 이 와인은 누구로 거듭날까 궁금해졌다. 마고는 200여 년 전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 최고의 와인으로 극찬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손녀의 이름을 마고로 지어준 바 있다.

특히 90년산은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100점을 던지며 80, 90년대 마고 와인 중 으뜸으로 평가한 명작이다. 밤안개 속에서 고혹적인 여인이 서서히 다가오라고 디캔터에 와인을 모셔뒀다. 한 시간이 지나 살짝 코를 대니 좀 더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적당한 스페인 와인 한 병을 마신 후 샴페인으로 입가심하고 나서야 그는 자태가 보인다고 말했다. “오드리 헵번”이라고 했다. 난 그에게 앞으로 2주일은 다른 와인의 접근금지령을 내렸다. “와인이 아쉽다”는 그의 말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두고두고 이 와인의 우아한 낭만과 환상을 기억하라”며 귀가시켰다.

by vinamour | 2009/02/15 22:46 | forbes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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